main
이름: 대종회
2021/3/30(화)
사랑방 이야기 (4) - 찬밥 먹는 날 寒食의 유래  

 

구 본 혁(具本赫)

 

사랑방 이야기 (4)

 

찬밥 먹는 날 寒食의 유래

 

중국의 고대 춘추전국시대에 진(晉)나라의 文公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 19년 동안을 망명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 헌공에게 ‘여희’라고 하는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자기가 낳은 아들로 왕을 삼기 위해 음모를 꾸며, 文公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어 文公까지 죽여 없애려고 하자, 文公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다른 나라로 피신하여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고난을 겪는 동안 文公이 허기에 지칠 때면, 따르던 신하들 중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였던 개자추란 신하가 있었다. 그런데 뒷날 文公이 고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공신들을 거론할 때에 아쉽게도 많은 신하들이 거론되면서 그 개자추만이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개자추는 문공을 龍, 자신을 뱀으로 비유한 노래(龍蛇之歌)를 지어 부르면서 늙은 어머니를 업고 면산이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문공이 왕위에 올라 안정을 찾게 되자, 지난날 유랑시절 자신에게 지성을 다하였던 개자추가 조정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로 개자추를 공신에 들이지 못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개자추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의 행방은 묘연하여 실심해 오던 중, 어느 날 개자추가 노모를 업고 면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들을 풀어 면산을 뒤지어 찾게 하였다. 그럼에도, 개자추가 나타나지 않자 면산에 불을 지르면 나오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불을 지르게 하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그 산속에서 타 죽고 말자 文公은 크게 탄식하며 후회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온 나라에 그날만큼은 불을 사용치 못하도록 금화령(禁火令)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해서 온 나라 백성들은 그 후로부터,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전날 밤에 밥을 미리 해 놓았다가 그 날만은 찬밥을 먹게 되었는데, 이를 찰 한(寒)자 밥 식(食)자 하여 한식날이라고 전하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부터는 이날을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의 문턱인 새봄을 맞이하며 겨우내 살펴보지 못했던 조상님들의 산소를 살펴보는 대표적인 큰 명절로 숭상해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는 종묘는 물론 능침에까지 향사하고 민간층에서도 조상님들의 산소를 살펴 붕괴한 부분을 고쳐 손질하고 제물을 갖추어 차례를 올리는 빼놓을 수 없는 고유명절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래 점선 내 평설 참조)

 

 여기에 참고로 비교가 되도록 신라 시대의 물계자(勿稽子)라는 사람을 덧붙여 소개한다.

 

  신라 10대 내해왕 17년(212)에, 보라, 고자(현 고성), 사물(현 사천)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국경을 침범해 오자 왕이 태자와 장군인 일벌찬 이음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동원해서 이를 막게 하므로 그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그때 싸움에 참여하였던 군사 중에 물계자의 전공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공을 거론할 때에는 물계자만의 공이 거론되지 않아 상을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물계자에게 말하기를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그대가 컸었건만, 그대에게만 상이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태자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물계자가 말하기를 위로 나라 인군이 계신데, 한낱 신하인 태자를 원망하여 무엇하랴 하였다. 그렇다면 왕에게 아뢰어 봄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물계자가 또 대답하기를 공의 대가를 얻겠다고 명분을 다투어가며 나를 드러내고자 남을 가로막으려 함은, 뜻 있는 선비가 할 바가 아니므로 오직 힘써 시운을 기다릴 뿐이네, 라고 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난 내해왕 20년에 또 골포국(현 합포) 등 세 나라가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갈화성(울주)으로 쳐들어오자,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물리쳤다. 그때도, 물계자가 참여하여 많은 적들을 죽였으나, 누구 하나 물계자의 공을 거론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실은 귀족사회인 신라에서 물계자의 신분은 일반 평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서로 꺼리고 시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자, 집으로 돌아온 물계자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인군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는 나라가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쳐야 하며, 임금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자신을 잊고 최선을 다하여 절의를 지키는 것이 충성이라고 하였는데, 앞서 있었던 보라와 지금의 갈화성 싸움들은 모두 국가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은 것은 몸을 잃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음이니, 이야말로 不忠이 심한 것 같소, 하며 不忠으로 임금을 섬김으로써 허물을 선조들에게까지 끼쳤으니, 어찌 이를 효라고 하겠는가. 이미 나는 충과 효의 도리를 모두 잃었으니, 무슨 낯으로 저잣거리에 나설 수 있겠는가? 하고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으로 들어가 곧고 속이 빈 대나무를 자신의 성품에 빗대어 가사를 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로 곡조를 삼아 거문고를 타면서 은거하며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출전: 삼국유사)

 

 

평설: 필자는 이 古事를 읽고 나서 바로 머리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글귀가 스쳐 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여야 할 도리를 다하였다면, 그것이 최선일 뿐이요, 천명(운)은 한낱 기다림 일뿐, 바람의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자추란 분이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어찌하여 공신반열에 들지 못하였다고 하여 “용사지가”까지 지어 불러가며, 무고한 어머니까지 면산 속으로 업고 들어가 함께 불타 죽게 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싶다.

 

이런 행위는, 결국 지난 19년간 지성으로 보필하여 왔던 인군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이요, 아울러 그 기간 동안 어머니를 편안히 모셔야 할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산속으로 업고 들어가 불에 타 죽도록 하였다면, 이것을 忠이요, 孝라 할 수 있겠는가. 19년 동안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다면, 본래의 어머니가 사시던 초야로 돌아가 편안히 어머니를 모시고 초연한 삶을 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선책이었을 것이다. 仁이란, 행할 때 어떠한 대가가 있기를 기다리며 행하는 仁은 참된 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였다.

 

개자추의 행위는, 처음은 매우 고귀하였으나, 끝에 가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감이 들어 씁쓸한 마음으로 평설 몇 마디 후기로 달아둔다.

 

 

 


  이름   메일   관리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번호제 목짧은댓글이름첨부작성일조회
273   6 · 25 전쟁 -백암 구용서   대종회   06/17-10:48  113
272   2021년 춘계향사 봉행안내   대종회   03/30-11:36  226
271   사랑방 이야기 (4) - 찬밥 먹는 날 寒食의 유래 ...   대종회   03/30-10:43  170
270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고찰(考察) - 具永洙(會)   대종회   03/30-10:31  156
269   자신회장 연임추대 - 대종회정기이사회 서면으로...   대종회   03/30-10:25  138
268   설날 차례를 지내는 절차   대종회   03/12-14:58  147
267   사랑방 이야기 (3) - 무릉도원(별천지)의 유래   대종회   03/12-14:22  136
266   근하신년   관리자   03/12-13:52  135
265   신년사   관리자   03/12-13:47  117
264   대종회 사칭 주의 안내   대종회   12/16-10:11  252

 
처음 이전 다음       목록 쓰기

ⓒ Copyright 1999~   TECHNOTE-TOP / TECHNOTE.INC,

Copyright ⓒ2002 능성구씨대종회 All rights reserved.
Tel: (02) 742-6818  Fax: (02) 762-4049
 기획·제작:뿌리정보미디어 Tel (02) 716-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