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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대종회
2017/12/27(수)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②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②

“당인(黨人)들아 촉(蜀) 땅의 개를 돌아보라” 

동서 당쟁에 초연하면서도 사헌부 시절 목숨 건 상소문 올려...

관직 많아 위패 글씨만 98자에 달하지만 집 한 칸 없이 마감한 청빈한 삶

 

 

백담은 이후 호조 좌랑, 이조 좌랑, 집의, 사간 등을 거쳐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어 대사간·대사성·대사헌에 오르고 병조 참판,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한다. 그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빈했다. 이준은 생애를 기록한 ‘행장’에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도록 벼슬했지만 집 한 채도 마련하지 않고 빌려 살았다”고 적었다. <백담집>을 국역한 한국국학진흥원 장재호(54) 전임연구원은 “청백함은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중도의 바탕이 된 것 같다”고 평했다.  동강서당을 나와 서당 옆 구운회 후손의 집에 들렀다. 백담이 거쳐 간 관직 이야기가 나오자 후손은 불천위 제사 때 지방(紙榜)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설명했다. 신주를 서당으로 옮기기 전이다. 써 둔 게 있었다. “신주(神主) 전체가 모두 98자입니다. 이보다 글자 수가 더 많은 신주는 듣지 못했습니다.” 교지(敎旨)를 받은 관직이 그만큼 많다. 신주는 세로 한 줄로 쓰는 게 관례이지만 너무 길어 끝 부분은 두 줄로 처리돼 있다. 글자가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도맡아 읽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긴 관직명을 읽다 보니 축문을 잘 읽는다는 말을 듣는다고 우스갯소리를 곁들였다.  1584년(선조17) 이조 참판 시절이다. 동서 분당이 시작되며 사람들은 한 쪽을 표방하며 반목하기 일쑤였다. 백담은 아는 게 없는 듯 태연히 처신했다. 주장은 사심이 없었다. 사람을 쓸 때는 동인과 서인을 묻지 않고 오직 적임자를 등용할 뿐이었다. 간혹 시끄러워지면 “나랏일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닌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탄식하며 답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당인(黨人)으로 지목되면 관직에 임명돼도 부임하지 않았다. 불편부당, 중도의 자세였다.

 

“하늘은 백성을 통해 본다”

 

그에게 기준은 당파 아닌 오직 백성이었다. 1572년 구봉령은 사헌부에서 목숨을 건 상소문을 올린다. 선조 5년이다. 임금이 민가를 헐어 원성이 커지고 가을이 돼도 우레 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였다. 그래도 직언하는 신하는 없었다. 그는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을 통해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을 통해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를 인용하며 즉위 때의 초심을 지키시라고 간청한다. 용기 있는 직언이었다.

 

<백담선생문집>은 1670년(현종11) 풍기군수 김계광의 주선으로 10권 4책이 첫 간행됐다.

 

백담은 관직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려는 이상과 반대로 흘러가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다. 스승을 닮았다.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정한 것은 1570년 퇴계가 돌아가신 해였다. 그때부터 조정에 있는 날보다 휴가 등으로 고향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는 초야에서 제자들에게 <통감>을 가르치고 치세와 난세를 토론했다. 권력욕이 없는 중도였다.  동강서당 왼쪽에는 백담종택이 있다. 전통 한옥이 아닌 일반 주택이다. 종택은 본래 사당이 남아 있는 건너편 지내리에 200년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내리 입구에는 구봉령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백담의 16대 종손인 구성모(66) 씨는 직장을 따라 경기도 수원에 살고 있다. 종택 뒤가 구운회 씨 집이다. 안동시 와룡면 능성 구씨의 600년 세거지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두 집만 남았다.  구봉령은 11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고향의 벗과 자연은 시의 소재였다. ‘김언우 등 여러 사람이 구선대(九仙臺)에 왔기에 나의 시에 차운하라고 재촉하다’란 시도 그중 하나다. 아홉 선비가 놀았다는 구선대는 지금은 주변으로 도로와 다리가 놓이면서 운치가 사라졌다. 일대에 백담구곡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긴 문적은 방대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에 물에 잠겨 말리느라 펼쳐 놓은 백담 할배 서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게로 50짐이 넘는답디다. 6·25가 터지자 독에 묻고 피란했는데 돌아오니 물이 들어 대부분 버렸어요.” 구운회 씨가 원주에 살던 집안 어른 집에 들렀을 때의 목격담이다. 그는 “서책이 종가가 아닌 그 가치를 아는 3대 선비 집으로 가 있더라”고 말했다.  그리고 20년 전쯤 TV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구봉령의 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주 그 집이 나주로 옮긴 뒤 손자가 따로 보관한 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감정가는 그날 세 권에 2500만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종손은 직후 일기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했다. 보상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2002년 종가는 목판 265점과 주계서원 편액 등 사당 안에 보관해 온 백담 자료를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목판의 1호 기탁이었다.

 

구봉령이 심었다는

와룡면 지내2리의 수령 500년 느티나무

군자의 도는 밝은 해와 같다

 

구봉령은 당쟁의 시대에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 촉 땅의 개가 해를 보고 짖은 설)’이란 글을 남겼다.  “촉(蜀) 땅은 옛날에 이른바 ‘하늘이 샌다’는 곳이다. 늘 비가 내리고 갠 날이 적어 사람들이 해를 볼 수 없었다. 개는 해가 한 번 나오면 바로 짖어댄다. 환한 빛은 해만한 게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이는 늘 보던 것에 친하고 보지 않던 것에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에게 곤욕을 치르는 것은 촉의 해 하나뿐이 아니다. 군자의 도는 밝은 해와 같다. 주공(周公)은 천하의 해였기에 여러 아우가 짖어댔고, 공자는 만세의 해였기에 숙손(叔孫)이 짖어댔다. 성현도 곤욕을 면치 못했는데 다른 사람이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은 울부짖고 그칠 뿐이다. 그러나 소인이 군자를 보고 짖어댐은 반드시 물고 뜯고서야 끝이 나니 나라에 참혹한 화를 미친다.”  백담은 촉 땅의 개를 통해 치우침의 맹목성을 경계했다. 가짜뉴스로 상대를 공격해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요즘의 행태에도 일침이 될 듯하다. 여야가 정권을 교체하면서 상식을 벗어난 극단의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든 야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국익은 밀려나고 진영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십상이다. 당쟁의 시대, 중도를 지킨 구봉령을 지금 돌아본 이유다.예학에 조예가 깊어 임금의 삼년상 만류를 읍소

 

“말단의 예절은 지키고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가”

 

백담 구봉령은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례(四禮)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이 전한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권제를 따르도록 청한 계사(議政府率百官請從權制啓)’가 대표적이다. 1575년(선조8) 백담이 글을 짓고 의정부 이하 대소 신하들이 모여 임금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당시 선조의 부모가 돌아가셨다. 선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식 된 도리로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신하들이 대궐에 모여 절박한 심정으로 삼년상을 만류했으나 임금은 단호히 거절했다. 마침내 백담이 경전과 고사를 들어 읍소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삼년상은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몸을 손상하여 목숨을 잃 는 것은 불효에 견주었습니다. 부모가 남긴 몸을 잇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고 사소한 예절을 따르는 것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필부도 그러한데 종묘를 잇고 신민이 의탁하는 군주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런데도 다만 말단의 예절을 지키고 막대한 책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담은 그러면서 삼년상을 예법대로 마치지 않은 등나라 문공(文公), 위나라 효문(孝文), 송나라 효종(孝宗)의 사례를 들었다. 이들이 책임 때문이지 불효해서 그랬겠느냐는 것이다.  ‘상례문답(喪禮問答)’이라는 글도 남아 있다. 제자인 권춘란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첫 질문은 적자(嫡子: 본처가 낳은 자식)’와 얼자(孼子: 양반과 종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상복 차이였다. 백담은 이렇게 적었다. “예(禮)를 고찰해보면 같고 낮음을 분별한 문구가 없다. 예는 인정에 따라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지금 또한 따라서 시행해야 하고 버리는 것은 세속의 견해이다.”
 

스승을 위한 심상(心喪) 3년

 

권춘란은 스승에 대한 상복도 물었다. 답은 이렇다.

“모든 사람은 스승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한다. 은혜의 경중과 대소를 헤아려 시행하고 일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에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는 않으나 상중(喪中)과 같이 처신하는 행위) 3년이라 했다. 자공(子貢)은 스승 공자를 위해 돌아와 마당에 집을 짓고 또 3년을 지냈다. 어떤 상복을 입었는지는 모르겠다. 망령된 내 생각은 흰 상복에 흰 띠를 두르고 공무를 보러 나갈 때는 평상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백담은 실제로 스승 퇴계가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며 소복을 입고 기일에는 반드시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했다고 전해진다.(끝)

 

한국국학진흥원에 1호로 기탁된 <백담문집> 목판.

 

 

편집자 주 : 상기 기사는 2017년도 월간중앙 7월호에 게재된 기사로 글을 쓴

              송의호 기자로부터 종보 게재 허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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